라푼젤

 


 

 

1. 음악 하는 남자

 

너는 참 생긴 거랑 다르게 논다. 이재현을 평가할 때 으레 하는 말들이 그거였다. 얼굴만 보면 세상 청순하게 생겨서 욕 한 마디 못할 것 같다고 했는데, 쌍욕은 기본에 급식체는 옵션인 재현의 언어생활을 본 사람들이 다 그랬다. 생긴 거랑 다르게 논다고.

 

입만 걸었으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문제는 행실도 그랬다는 거였다. 고등학생 때부터 일주일 단위로 여자 친구를 갈아치웠고 예쁘장하다 싶으면 남자도 만났다. 보수적인 성격의 엄마 아빠는 너 도대체 뭔 헛짓거리를 하고 다니는 거냐, 네 누나는 안 그런다, 이게 내 배에서 나온 게 맞냐면서 등짝을 퍽퍽 때리기 일쑤였다. 어떻게 온 동네에 네 얘기가 들려. 이게 진짜 뭐가 되려고 그래. 한숨 섞인 그 말을 들으면서 재현도 진로를 좀 고민했다. 그러게. 나 진짜 뭐 되지?

 

잘하는 건 많았지만 하고 싶은 건 별로 없었고, 재밌는 것들도 있었지만 그런 건 금방 질렸다. 유일하게 질리지 않는 게 있다면 음악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쳤을 때 재현은 결심했다. 가수 해야겠다. 3 원서 접수 시즌, 수업 째고 친구들이랑 노래방을 다니면서 갈고 닦은 실력으로 가수가 되겠다고 부모님 앞에서 선언했을 때, 말 그대로 집안이 뒤집어졌다.

 

내 아들이 딴따라라니, 대학도 안 가겠다니! 무려 대학원까지 나온 엄마 아빠는 재현의 말을 듣자마자 거품 물고 쓰러질 뻔 했다. 네가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계속 그렇게 엇나가는 거야!? 그렇게 네 마음대로 살 거면 아예 나가 살아! 그 말에 재현은 진짜로 짐을 쌌다.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다. 야망도 유전이라서 성공하기 전까지는 손 벌리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래야 멋있으니까. 부모님한테 용돈 받아쓰는 예술가라니, 그딴 건 어디서 들어본 적도 없다.

 

...그런데 내 계획에 이런 건 없었다고. 음원 차트 광탈. 오늘의 차트 순위 밖. 그 익숙한 문구를 보는 순간 이재현 인생 계획 어긋나는 소리가 들렸다. 무조건 2년 안에 전국구로 떠서 금의환향을 하겠다는, 집을 나설 때의 결심이 먼지처럼 흩어져갔다. 내 계획에는 벚꽃엔딩과 볼 빨간 사춘기밖에 없었는데. 씨발 뭐가 이래? 이거 오류 아니냐? 재현이 그렇게 말하면서 핸드폰을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자, 옆에 있던 선우와 현준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노래가 거지같은데 뜨겠어요?”

노래보다 성격이 거지같아서 못 떠.”

 

 

...니네 좀 닥치면 안 되냐? 재현이 지끈거리는 머리통을 부여잡고 그렇게 말하자 한 마디도 안지는 김선우가 또 답했다. 저 봐, 성격 더러운 거. 저러는데 누가 좋아해.

 

김선우와 허현준은 재현의 집에 꼽사리를 껴서 사는 객식구였다. 동생 콜렉터 이재현의 전생의 악업에 대한 업보 같은 존재. 부산에서 상경을 하신 인스타스타 허현준은 아예 재현의 홍대 자취방에 눌러앉았고, 툭하면 가출을 일삼는 미래의 랩스타 김선우는 잊을 만하면 짐을 싸서 쳐들어왔다. 덕분에 재현의 집에는 햇반이고 스팸이고 뭐고 남아나지를 않았다.

 

어이가 없어진 재현이 버릇처럼 혀로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내 성격이 뭐 어디가 어때서? 오갈 데 없는 가출 청소년 받아주는 것만으로도 예수님 저리 가란데. 막말로 이게 집구석이야? 난민 수용소지? 그 말에 현준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근데 형은 남 비위를 못 맞추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대체 언제부터 노래하는데 남 비위까지 맞춰야 되는 건지는 몰랐지만. 이 바닥에도 카르텔이라는 게 있었다. 그 분 곡 받으면 무조건 뜬다니까. 걔가 피쳐링 해주면 백퍼 잘 돼. 이미 그런 수식어가 따라붙는 사람들에게 빈말이라도 할라치면 이재현은 입가가 뻣뻣해지고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평생을 남 비위 맞출 일이 없어서 더 그랬는데, 아무튼 그런 건 적성에 안 맞았다. 꼭 그렇게까지 해서 돈을 벌어야 되나. 재현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럴 거면 내가 아이돌을 했지.”

그러니까요. 차라리 아이돌을 하지. 형은 눈이 반짝거려서 아이돌 하면 딱인데.”

됐다. 시대가 날 몰라주는 거지 뭐.”

 

 

국가의 낭비이자 인류의 마이너스다. 재현이 진지한 표정으로 그런 개소리를 내뱉자 선우와 현준이 지들끼리 수군거렸다. , 지가 지 입으로. 저러니까 망하지.

 

 

 

2. 청담동 라푼젤

 

니는 그 거적데기를 돈 주고 샀니? 그렇게 타박을 줬던 등짝이 죄다 파인 티셔츠는 들어본 적도 없었던 명품, 항상 뒤축을 꺾어서 질질 끌고 다니는 슬립온은 알고 보니 아르마니, 가지고 다니는 전자기기는 죄다 애플. 이재현은 항상 생각해왔다. 부자면 허현준일 것이라고.

 

...근데 김선우가 웬 말이야? 재현은 카톡창에 적힌 주소지와 눈앞의 대저택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헛웃음을 지었다. 서울 땅 덩어리 좁은 거 아니었어? 이런 집이 있어도 되는 거야? 나는 또 청담동이라길래 청담동 반지하인 줄 알았지. 재현이 습관적으로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 물려고 하다가 그만 관뒀다. 이 동네에서 길빵했다가는 정말로 빵에 들어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발단은 가사였다. 본 투 비 이과생인 이재현은 매사가 이성적이었다. 그래서 가사를 써도 뭔가 좀 딱딱했다. 형 노래가 구린 건 가사가 구려서 그래요. 수학 공식도 이보다는 말랑거리겠네. 혹시 기계세요? 그런 말들을 들을 때면 싱어송라이터 이재현의 자존심이 개박살이 나서 공기 중에 부유하는 게 보였다.

 

가사로 쓸 만 한 건 이미 다 나온 거라니까. 어차피 사랑노래는 다 동어반복이잖아. 그니까 이렇게 가사가 지루하지. 그렇게 말하는 재현을 보며 선우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제 꺼 하나 형한테 버려드려요? 하고 물었고, 재현은 미끼를 덥석 물었다. 그래주면 고맙지. 근데 집에 놓고 왔는데. , 존나 어쩌라는 건지.

 

제가 가출을 했는데 집에 어떻게 들어갑니까? 아쉬운 사람이 가지고 오셔야죠. 선우의 말대로 어쨌든 아쉬운 건 재현이었다. 2년 안에 무조건 뜬다. 그렇게 계획했던 2년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고, 이러다가는 노래가 뜨는 것 보다 자신이 한국을 뜨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하는 초조함에 솔직히 좀 쫄리던 터였다.

 

, 어떻게든 되겠지. 재현은 제 앞의 인터폰을 눌렀다. 근데 답이 없다. 분명히 김선우가 이 시간에는 집에 형밖에 없을 거라고 했는데. 이거 분명히 없는 척이네. 촉 좋은 이재현의 잠자고 있던 승부욕이 이상한데서 발동했다. 초당 5회씩 받을 때까지 계속 눌러대자 결국 인터폰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누구세요...?

, 드디어 받네. 저 김선우 아는 형인데요. 선우한테 뭐 좀 부탁받아가지고, 그것만 가지고 나갈 테니까 문 좀 열어줘요.”

- 근데 지금 집에 아무도 없어서요...

그 쪽 있잖아요.”

 

 

저 급하니까 얼른. 그렇게 요상한 반존대를 쓰면서 재촉하자 인터폰 건너편에서 잠깐 말이 없더니 철컹, 하고 대문이 열렸다. 그 문을 열고 들어선 재현은 또 기함을 했다. 뭔 마당이 축구장이야. 잘하면 집에서 길도 잃겠다. 잘 꾸며진 정원을 가로질러, 집 안의 연못을 지나 계단을 올랐다. 그 순간 또 문이 열렸다.

 

김선우한테는 형이 하나 있다고 했다. 이름은 김영훈, 나이는 이재현과 동갑, 특이사항으로는 우당탕탕의 인간화. 재현은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는 영훈에 대해서 이미 빠삭했다. 왜냐면 김선우가 술만 취하면 영훈의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았으니까.

 

우리 집은 아주 편애의 도가니탕이야. 몸 약하다고 엄마고 아빠고 죄다 형만 챙기고, 나한테는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바라기만 하는데 내가 어떻게 집구석에 붙어 있어요? 근데 내가 제일 짜증나는 게 뭔지 알아요? 형한테 짜증이라도 내려고 그 눈을 보잖아, 그러면 아무 말도 안 나와.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말문이 걍 턱 막혀요. 그래서 내가 집을 나오는 거라니까.

 

술만 마시면 이어지는 그 뻔한 레파토리에 재현은 오징어 다리를 뜯으면서 대수롭지 않게 말했던 적이 있었다. 그 정도면 안녕하세요 나가도 1위 먹겠다. 함 신청 해봐. 근데 문을 열고 나온 영훈을 보는 순간, 재현은 저도 모르게 벌어지는 입을 의식적으로 다물었다.

 

, 비주얼 쇼크. 쟤 뭐 저렇게 생겼냐. 문 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민 경계하는 강아지 같은 눈이 반짝거리면서 빛이 났다. 죽어도 사진은 안 보여주길래 나는 또 못생겨서 쪽팔린가 보다 했지. 근데 이건 좀... 너무 예쁘잖아.

 

 

-

 

 

집이 무슨 드라마 세트장 같았다. 영훈을 따라 선우의 방이 있다는 3층으로 올라온 재현은 책상 서랍을 열며 유에스비를 찾는 그 뒷모습만 바라봤다. 처음 볼 때부터 느꼈지만 되게 말랐다. 품이 넓은 셔츠 사이로 가느다란 몸 선이 드러났다. 그 순간 영훈이 뒤를 돌았다.

 

 

이거 맞아?”

, 그거 맞네. 까만색 유에스비.”

“......”
안 주고 뭐하냐?”

내 부탁 들어주면 줄게.”

 

 

초면에 대뜸 부탁을 하는 건 뭔 경우인지. 게다가 이건 부탁이 아니라 협박이다. 물론 하나도 위협적이지는 않았고, 단지 좀 어이가 없었을 뿐. 이 동네에서는 부탁을 뭐 그딴 식으로 하냐? 재현이 얼굴을 찡그리고 그렇게 말하자 영훈이 작은 목소리를 냈다.

 

 

나도 같이 가면 안 돼?”

“...?”

제발 부탁이야.”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연신 떨렸다. 척 봐도 비쩍 마른 몸은 솔직히 무섭지도 않았다. 유에스비를 꾹 쥐고 있는 손목은 또 어찌나 얇은지, 두 손목이 한 손에도 잡힐 것 같았다. 그런데 재현을 약하게 만드는 것은 그 눈이었다. 김선우를 아무 말 못하게 만든다는 그 눈동자.

 

물기가 어려서 그렁거리는 눈으로 상대방을 바라보는데, 그 눈을 보면서 거절의 말을 하려면 혈관 속에 피가 아니라 얼음이 돌아야 했다. 안타깝게도 이재현은 피랑 눈물이 있는 인간이었다. , 나 원래 사람 우는 거에 강한데. 쟤는 뭐 저렇게 생겨서. 재현이 짜증스레 머리를 헝클었다.

 

 

기브 앤 테이크 알지? 내가 너 김선우한테 데려다주면 넌 뭐해줄 건데?”

 

 

그렇게 말하자 영훈이 잠깐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너 원하는 거 해줄게. 내가 뭘 원할 줄 알고 그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하는 건지. 그치만 재현으로써는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꾹 쥐고 있어 하얗게 질린 영훈의 손을 재현이 맞잡았다.

 

 

-

 

 

이게 웬 굴러들어온 떡, 아니 빵이냐. 모아 놓은 돈도 슬슬 떨어져 가는데 쟤 등 좀 쳐먹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했던 재현은 지금에 와서야 그 생각이 얼마나 멍청한 것이었는지를 깨달았다. 김영훈은 가는 길 내내 꽃이고 동물이고 뭐고 죄다 시선을 주면서, 마치 세상을 처음 보는 어린 애처럼 감탄을 했다. 그러다가 전철을 타고 나서는 끝도 없이 우울해하기 시작했다.

 

집에 도둑이 들면 어떡하지? 그렇게 말하면서 이빨로 손톱을 닥닥 뜯었다. 집은 좀 세콤이 지키게 놔둬라. 재현이 한숨을 쉬면서 그렇게 말했는데, 그 말은 듣지도 않았는지 또 갑자기 얼굴이 환해졌다. 당산에서 합정을 지나는 전철 차창 밖의 한강을 보면서 애처럼 좋아했다. 재현아, 저거 봐! 강물 막 반짝반짝해. 진짜 예쁘다! 그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영훈의 감정에 지칠 대로 지친 재현이 결국 한 마디를 했다. , 너 정신 이상하냐...?

 

하긴, 10년을 집 안에서 갇혀 지냈으면 제 정신인 게 더 이상하지. 요즘 현대인들에게 정신병 하나는 필수라고 하던데. 허현준도 예술병 말기고 김선우도 힙합병 말기니 저 정도 조울증이야 뭐 귀여운 수준이었다. 아무튼 정상인 인간은 나밖에 없네.

 

 

-

 

 

뭐랄까, 물가에 내 놓은 애 같달까. 7살짜리를 달고 다녀도 이보단 편하겠다... 전철에서 내리면서 잠깐 한 눈을 판 사이에 영훈은 또 껌 한통을 오만원에 사왔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너 껌 얼만지 몰라? 근데 안 되셨잖아... 다리가 아프신가봐. 그렇게 말하는 영훈에게 저 분 이따가 퇴근하실 때 제 다리로 일어나서 걸어가시는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을 말해주려다가 그냥 관뒀다.

 

 

니 왜 이렇게 쓸 데 없이 이큐가 높아?”

재현아, 근데 공감 능력도 지능이래.”

 

 

어이가 없다. 김영훈은 순한 얼굴로 할 말은 또 따박따박 다 했다. 저거 진짜... 말이나 못하면.

 

근데, 이 때만큼 어이없지는 않았던 것 같다.

 

 

고양이다.”

 

 

지가 무슨 디즈니 공주야 뭐야? 동식물들이 왜 저렇게 따르는 거지...

 

드디어 전철역을 벗어나서 사람들 틈을 비집고 좀 걸어가나 싶었는데, 영훈은 또 식당 앞 길거리에 앉아 있는 고양이를 보고 눈길을 뺏겼다. 눈길만 뺏겼으면 다행이었다. 아예 고양이어로 대화를 시도하던 영훈이 그 와중에 말이 또 통했는지 뒤에 서 있는 재현을 돌아봤다. 얘 배고픈가봐. 아 어쩌라고? 재현아, 근데 공감능력도 지능... , 씨발 진짜...

 

공감능력 떨어진다는 소리는 참아도 지능 낮다는 소리는 못 참는 이재현이 앞머리를 한 번 쓸어 넘겼다. 여기 가만히 있어. 그렇게 말하고 걸어가다가 다시 뒤를 돌았다. 영훈이 여직 저를 보고 있었다. 재현은 저런 눈동자를 본 적이 있다. 산책할 때 제 뒤를 따르던 강아지의 눈동자. 그 눈이 꼭 다롱이를 연상케 해서 재현이 습관처럼 말했다. 기다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이 마냥 순했다.

 

아무튼 근처 편의점에서 고양이 줄 소시지를 몇 개 사서 나오는 길이었다. 혹시나 무슨 일이 생겼을까봐 걸음을 빨리한 재현은 아니나 다를까 열심히 전도 중인 21조 패거리에게 붙잡혀 있는 영훈을 보고 정말 기도 안찼다. 딱 봐도 신천지. 게다가 영혼이 맑으시고 조상 덕이 있으시다는 개소리를 김영훈은 또 고개까지 끄덕이며 경청하고 있었다. 전도하는 사람들은 무슨 레이더라도 달린 건지, 순진한 애들을 귀신같이 알아봤다. 저쪽 세계는 어떻게 된 게 상도덕이란 게 없어. 순진한 애 등쳐먹으면 재밌나. 그런 생각에 부아가 치밀어서 당장에 가서 데려오려고 했는데 김영훈 반응이 가관이었다.

 

 

, 진짜요? 칭찬 감사합니다!”

근데 조상님께 제를 올려야...”

, 재현아!”

 

 

이어지는 말을 의도치 않게 씹은 영훈이 재현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더니 제 쪽으로 뛰어왔다. 나 영혼이 맑대! 그렇게 말하면서 해맑게 웃는 얼굴이 정말로 영혼이 맑아보여서 개웃겼다. 답정너에는 넌씨눈이라 이건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졌다. 왜 웃는지 영문을 몰라 하던 영훈도 재현을 따라 웃었다. 한 겹의 그늘도, 구김살도 없는 얼굴.

 

 

사람들 다 좋은 것 같아. 처음 보는데 막 칭찬도 해주고.”

 

 

...그렇지만 이건 아니다. 그거 칭찬 아닌데. 어디 가서 사기 당하기 딱 좋았다. 재현이 다분히 인류애적인 생각으로 영훈에게 주의를 줬다.

 

 

, 앞으로 사람들이 말 걸면 걍 쌩까.”

?”

왜긴 왜야. 다 너 등쳐먹으려고 하는 거니까 그렇지.”

“...?”

세상이 원래 그런 거야. 좀 순진하다 싶으면 등쳐먹거나 따먹거나 하려고.”

그치만 재현이 너는 안 그러잖아.”

 

 

그렇게 말하는 눈동자가 참으로 천진하기 그지없었다. 나도 니 등쳐먹으려고 했는데 이 등신아...

 

지한테만 잘해주면 좋은 앤가. 뭐 딱히 잘해준 것도 없다. 성선설이라도 믿는 모양이었다. 인간관계 한 번 겪어보면 성악설을 믿게 될 텐데, 사회생활을 안 해봤으니 애가 좀 물정을 몰랐다. 어느 영화의 캐치프레이즈처럼 우리나라에서 순진한 건 불법이다. 속인 사람보다 속은 사람을 탓하는 세상에서는, 사람을 믿는 게 제일 큰 죄니까.

 

 

니 진짜 사람 보는 눈 없다. 나 별로 좋은 애 아닌데.”

너 좋은 애 같아.”
나 믿지 마라.”

왜 믿으면 안 돼?”

 

 

반문하는 그 말에는 할 말이 없었다. 이재현은 귀여운 것에 약했다. 강아지나 고양이나 어린 아이 같은. 사실은 귀여운 것에 약한 게 아니라, 제가 돌봐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못한다는 듯이 구는 그 눈동자에 약한 것인지도 몰랐다. 내가 없으면 안 될 것처럼 굴고, 나밖에 모르는 존재. 그런 눈을 보면 이상하게 지켜주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저를 쳐다보는 영훈의 눈이 꼭 그랬다. 재현이 할 수 없이 대답했다.

 

 

“...그럼 반만 믿든가.”

 

 

그렇게 말하니 대답 않고 웃는 얼굴이 그야말로 해맑았다.

 

 

-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당연히 작업실에 있겠거니 싶었던 김선우는 간 데 없었고 하필이면 오늘따라 비주얼이 좀 충격적인 애들이 작업실을 꽉 채우고 있었다. 시간을 나눠서 같이 쓰는 반지하 작업실 안은 매캐한 담배 연기가 가득했다. 그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영훈은 분리불안이 있는 애처럼 재현의 옷자락을 꾹 움켜쥐었다.

 

팔뚝이고 모가지고 뭐고, 보이는 곳곳에 용이며 이레즈미며 온갖 있어 보이는 한자성어를 수놓은 재현의 친구들을 보면서 영훈은 바짝 쫄았다. 저런 비주얼은 본 적도 없었다. 슬그머니 재현의 등 뒤로 숨자, 힐끔 저를 쳐다본 이재현이 그 손을 마주잡았다.

 

 

애 겁주지 마.”

아무 것도 안했는데 왜 지랄이야. 지가 뭐 달고 들어왔으면서.”

얘가 뭐 키링이냐? 달고 다니게. 얘한테 그런 말도 하지 마.”

 

 

그렇게 말한 재현이 손을 몇 번 휘휘 내저었다. , 담배 꺼. 애 있잖아. 그리고 환기 좀 시켜라. 니네 그러다가 폐암 걸려 뒤져. 그렇게 갖은 유난을 다 떠는 재현을 보며 친구들은 어이가 없어서 서로 시선만 주고받았다. 누구보다 담배를 많이 피우시는 분이 잘도 저런 소리를... 게다가 저렇게 큰 애가 도대체 어디 있어?

 

 

누군데 그렇게 싸고돌아?”

김선우 형.”

. 그 말로만 듣던...”

 

 

에바야. 개잘생겼네. 김선우가 절대 얼굴 안 보여주길래 난 또 존나 못생긴 줄 알았는데. 1도 안 닮았어. 그렇게 호들갑을 떨던 친구들이 영훈의 주위로 다가와서 선우도 없는데 온 김에 싸인이나 받고 가라며, 좋아하는 가수 있냐면서 질문 공세를 펼쳤다. 그 말에 영훈이 긴장감에 꾹꾹 물어 씹던 입술을 떼고 말했다.

 

 

저 현재 좋아해요!”

 

 

갑자기 모든 시선이 재현에게로 쏠렸다. 현재는 이재현의 예명이었다. 면전에 대고 대뜸 고백을 받은 재현이 큼큼 어색한 헛기침을 하면서 시선을 피했는데, 벌겋게 달아오른 귀 끝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 이 분위기 뭐야? 그 묘한 분위기를 느낀 친구들의 표정이 짓궂어졌다. 걔 엄청 못생겼는데. 상상했던 거랑 완전 다를 걸요? 성격도 개더러운데? 맞춤법도 다 틀리는데? 그런 말들을 가만히 듣고 있던 재현은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새끼들이, 지들은 얼굴이 다 틀려먹었으면서. 그런데 순간 영훈이 환하게 웃었다.

 

 

괜찮아요. 왜냐면 좋아하는 건 목소리니까.”

“......”

저는 매일 같은 곳에 있으니까 매일 매일 같은 하루거든요. 근데 현재 노래를 들으면, 걔 목소리가 근사하니까, 갑자기 근사한 하루가 돼요.”

 

 

진짜 신기하죠.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다정했다.

 

재현은 아까 봤던 그 큰 집의 방 안, 커다란 창문 앞에 서 있는 김영훈을 떠올렸다. 눈처럼 흰 피부와 피처럼 붉은 입술, 흑단처럼 까만 머리칼을 한 영훈이 제 노래를 들으면서 고개를 까딱인다. 그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목덜미 아래의 움푹 들어간 쇄골과, 턱을 괴고 있는 마디 붉은 손가락이 눈앞에 그려졌다.

 

아오, 뭐가 이렇게 간지러워. 재현은 뒷목을 벅벅 긁었다. 꼭 사랑에 빠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

 

 

홍대는 이재현의 나와바리였다. 몇 걸음만 걷다 보면 아는 사람을 만났다. 결국 선우를 만나지 못한 영훈을 다시 집에 데려다 주려고 9번 출구 쪽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버스킹을 하면서 멘트 중이었던 제 친구였다. 순간 모든 이목이 재현 쪽으로 쏠렸다. , 현재다. 대박. 홍대 남신 맞네. 그렇게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보며 친구가 와서 노래 한 곡 하고 가라고 재현에게 손짓을 했다.

 

평소 같았으면 고민도 안 하고 뺐을 텐데, 옆에서 저를 쳐다보는 영훈을 보니 빼기가 좀 그랬다. 어쨌든 닉값도 해야 되고. 절대로 김영훈 앞에서 멋있어 보이고 싶다거나 뭐 그런 건 아니었고, 홍대 남신이라는 닉값은 해야 됐기 때문에 재현은 영훈을 자리에 앉혔다. 앉히는 대로 얌전히 자리에 앉은 영훈이 재현을 올려다본다. 재현이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해가 지는 저녁, 바로 옆에서 섞여서 들려오는 노랫소리, 지나다니는 사람들, 웅성거리는 소음, 사람들의 환호성, 그 모든 것들을 뒤로 하고 재현은 영훈의 눈을 쳐다보며 노래를 시작했다.

 

 

-

 

 

너 현재야? 너 진짜 현재야...?”

현재 맞으니까 고만 좀 물어봐라.”

. 근데 재현아.”
?”
너 진짜 현재 맞아...?”

 

 

아 나 진짜. 노이로제 걸리겠네. 그런데 저 감격한 얼굴을 앞에 두고 차마 뭐라고 할 수가 없어서 재현은 그냥 영훈의 손을 잡아끌었다. 몇 번 말하냐? 나 맞으니까 좀 가자.

 

영훈을 바래다주는 길은 아까보다 더 짧았다. 얘기 좀 하다 보니 벌써 집 앞이었다. 재현은 어째 발걸음이 채 떨어지지 않았다. 뭐가 이렇게 아쉽지. 대문 앞에서 선 영훈을 보며 멋쩍게 목을 긁적이다가 나 간다, 하고 말하며 뒤를 돈 순간이었다. 재현아.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재현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마른 침을 삼키며 영훈을 돌아봤을 땐, 세상에서 가장 청순한 얼굴이 바로 제 눈앞에 있었다.

 

 

우리... 또 볼 수 있어?”

 

 

오히려 그건 제가 묻고 싶은 거였다. 우리 또 볼 수 있는 거 맞냐고. 만약 오늘 이후로도 네가 보고 싶고, 생각나고,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하고 싶어지면,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되냐고.

 

 

 

3. Closer to you

 

! 재현이형! 아 왜 정신이 나가 있어요?

 

, 현준이 재현의 눈앞에서 엄지와 중지를 맞부딪혀 소리를 냈다. 그 바람에 턱을 괴고 있던 재현이 손을 삐끗했다. 그제야 멍을 때리던 얼굴이 현실로 돌아왔다. 어어, 나 불렀냐...? 그 말에 현준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형 요즘 왜 그래요? 뭐 고민이라도 있어요? 아무래도 며칠 새 제가 이상해지긴 한 듯 했다.

 

 

그게, , 어떤 애가... 네 노래를 들으면 하루가 바뀐대.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되냐?”

사귀자고 해야죠.”

 

 

...갑자기? 요즘 고딩들은 뭐가 이렇게 진취적이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현준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누가 채가면 어떡해요. 요즘 같은 세상에 그런 애가 어딨다고.

 

요즘 같은 세상에 김영훈 같은 애... 확실히 없지. 남자면 예쁘지를 말든가, 예쁘면 착하지를 말든가. 남들은 하나만 하기도 힘든 걸 김영훈은 혼자 다해서 멀쩡한 사람을 자꾸 이상한 사람으로 만든다. 재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옆에 놔뒀던 라이더 자켓을 챙겨 입었다. , 나 좀 나갔다 올게.

 

 

-

 

 

그래서 지금 이재현은 다시 영훈의 집에 와 있었다. 핑계거리가 없어서 빵까지 사들고 왔다. 초코 크루아상과 머핀, 롤케이크과 그 옆에 놓인 정체불명의 계란찜빵까지 샀다. 이게 뭔 자진해서 빵셔틀이야. 그런 생각에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다가도 눈앞에서 잘 먹고 있는 영훈을 보면 또 이 짓도 할 만 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아무튼 마음이 좀 복잡했다.

 

쟤는 빵을 갉아먹네... 무슨 토끼도 아니고. 그렇게 영훈이 먹는 모습만 힐끔거리고 있었는데 영훈이 말을 걸었다. 왜 자꾸 쳐다봐?

 

 

“...내가 언제 쳐다봤어?”

지금까지 계속 봤잖아.”

 

 

알고 있었다니. 티 안 나게 봤는데. 민망해진 재현이 갑자기 승질을 부렸다.

 

 

아니, 너만 입이고 나는 주둥이냐? 어떻게 사온 사람한테 먹어보라는 말 한 마디를 안 해.”

이거 너 먹어.”

 

 

그렇게 말하면서 영훈이 내민 것은 아까 한 입 뜯어먹더니 맛대가리가 없는지 옆으로 치워 놓았던 계란찜빵이었다. 왜 나한테 버리냐? 재현이 황당한 얼굴로 그렇게 묻자 영훈이 대답 않고 웃었다. 발그레한 뺨이 어이없게 귀여웠다.

 

안 웃을 때는 청순해 보였는데 웃으니까 또 귀엽다. 자연스레 우는 얼굴까지 상상이 된다. 사람을 면전에다 두고 내가 대체 뭔 생각을 하는 거지. 진짜 돌았나... 재현이 영훈의 얼굴을 보고 있던 시선을 내리자 이번에는 또 다리가 보였다. 다리가 길어서 겅중 올라온 바짓단 밑으로 드러난 발목이 꼭 손목처럼 가늘고 얇았다. , 쟤는 뭐가 저렇게 다...

 

 

영훈아, 너 저번에 나 원하는 거 하나 해준다고 했지?”

 

 

그 말에 영훈이 고개를 든다. 가까이에서 보니까 눈이 더 커다랬다. 눈알 쏟아지겠네. 뭐든지 말해보라는 눈치여서, 재현이 그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로 입을 열었다.

 

 

여행가자, 나랑.”

 

 

 

4. 소년의 사연

 

어렸을 때부터 아빠는 영훈에게 요구하는 것이 많았다. 뭐든지 가르쳐주려고 했다. 피아노도 기타도 드럼도, 수영도 양궁도 바둑도, 영어도 중국어도 일본어도, 종류도 참 다양한 많은 것들을 배웠다. 정작 어린 영훈은 너무 힘들다 투정이었지만 아빠는 단호했다. 담배와 술을 빼고 이 세상에 배워서 나쁜 건 없다고 했다. 그런 신념이 무너지게 된 것은 영훈이 사고를 당하고 나서부터였다.

 

영훈은 어렸을 때부터 유독 사고수가 많았다. 그 중에서 가장 크게 났던 사고는 다니던 학원 건물에 불이 났던 거였다. 그런 건 뉴스 기사에서만 존재하는 일인 줄 알았는데 제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인 줄은 몰랐다. 사경을 헤매던 영훈이 며칠 만에 깨어났고, 그 사이 엄마는 몇 번을 쓰러졌다 했고, 그 이후로는 학교도 못 갔다. 병원을 제 집처럼 드나들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요양 겸 홈스쿨링을 시작했다. 그게 10살 때의 일이었다.

 

사실 그 때의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사람이 너무 충격적인 일을 겪으면 기억이 흐려진다는데 아무래도 그런 건지, 아니면 계속된 전신마취의 영향인지, 그것도 아니면 너무 어릴 때의 일이라 원래 기억이 잘 안 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딱 하나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있다. 병원에서 깨어난 영훈의 손을 잡고 아빠가 했던 말. 너는 그냥 살아만 있으면 된다고. 너한테 아무 것도 안 바란다고. 링거를 하도 맞아 하얀 팔뚝에 선명하게 보이는 바늘 자국, 그 주위의 시퍼런 멍을 매만지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

 

 

그렇지만 이건 아니었다. 정말로 방 안에 갇혔다. 문만 열면 나갈 수 있었던 이전과는 달랐다. 철컥 철컥. 아무리 돌려도 열리지 않는 문고리를 붙잡고 늘어지다가 쇠 냄새가 나는 손으로 문을 쾅쾅 두드렸다. 알겠어, 나 그냥 집에 있을게. 어디 안 갈게. 대신 재현이한테 못 간다고 딱 한 마디만 하고 올게.

 

재현이랑 약속했단 말이야... 끝은 결국 울먹이는 목소리가 됐다. 영훈이 방문 앞에 주저앉아 무릎을 푹 끌어안았다.

 

왜 나는 행복한데도 불행한 걸까. 쥐면 부서질까, 불면 날아갈까, 엄마 아빠는 날 아껴주고, 생채기 하나 나지 않도록 꼭꼭 숨겨 주는데. 나한테 바라는 건 아무 것도 없다고, 너는 그냥 살아만 있으면 된다고 말해주는데. 그런데 영훈은 자꾸만 다른 생각이 든다.

 

근데 있잖아. 이게 살아 있는 거야? 왜 나는 여기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반짝이는 것들은 늘 그렇듯 금세 지나갔다. 이재현과 봤던 한강이 그랬고, 그 애가 노래하는 목소리가 그랬고, 영훈의 10대가 그랬다. 무엇 하나 잡아둘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영훈은 제 손을 내려다봤다. 고생 한 번 안 해본 하얀 손. 어떤 것을 선택했다는 것은 무언가를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신의 안녕 대신 제가 포기한 것은 뭐였을까. 그건 어쩌면, 지금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날것 그대로의 감정, 추억으로 남겨두고 싶지 않은 이재현과의 기억, 얼굴이 희고, 눈이 예쁘고, 말투가 유난히 불량한 재현이의 웃는 얼굴.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이보다 더 좋아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다시 예전처럼 이재현을 못 보는 건 싫었다. 영훈은 제 방문을 등지고 눈앞의 창문을 바라봤다. 방은 2, 창문 밑은 연못이었다. 망설임 없이 일어난 영훈이 달려 있는 커튼을 뜯었다. 책상 위에 놓여있던 가위를 가지고 와서 꾹꾹 힘을 주어 자르니, 무언가를 잡아볼 일이 별로 없었던 여린 손에 그대로 자국이 났다. 빨개진 손으로 자른 커튼을 최대한 세게 묶기 시작했다.

 

지금껏 제가 알던 세계는 모두 거짓말이다. 방 안은 거실에 놓여 있는 수족관 같았다. 장식용 플라스틱 풀들과 인조 모래로 꾸며진 휘황찬란한 가짜. 진짜는 여기에 없었다. 엄마 아빠가 꾸며놓은 것들로 가득한 이 집 안에는.

 

제가 지켜온 모든 것들이 이재현의 손을 잡는 순간 무너지게 되더라도, 영훈은 후회하지 않았다. 이재현은 처음으로 내가 선택한 내 취향이니까.

 

 

 

5. 어쩌다 사랑 따위를

 

세상은 평화롭고 인생은 지루했다. 어른들은 복에 겨운 소리한다고 말들을 했지만 재현은 때때로 무슨 일이 좀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전쟁이니 멸망이니, 꼭 그런 거창한 게 아니더라도. 요즘은 백세 시대라는데, 도대체 이런 상태로 어떻게 80년을 더 산단 말인가? 좆도 재미가 없었다.

 

유일하게 재밌다고 느꼈던 건 음악이었는데 그마저도 잘 안 풀렸다. 인생이 노잼이니 가사거리로 쓸 게 없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사랑을 좀 해봐야 가사도 쓰고 그러는 거 아닐까? 그래서 뭔지도 모르는 진짜를 찾겠다고 홍대 길바닥을 누비고 다녔다. 그런데 어디에도 그런 건 없었다. 노래 가사에는 있는데, 책에도 영화에도 드라마 속에도, 심지어 애들 보는 애니메이션 속에서도 판치는 게 사랑인데 현실에는 없다니. 온통 아류에 삼사류였다. 가사거리도 못되는 연애만 몇 번 하고 나서야 재현은 깨달았다. 사랑이니 순정이니, 그딴 거 이미 유행 지닌 지 오래라고.

 

예쁜 애들은 얼굴값을 했고 못생긴 애들은 꼴값했고, 돈이 많으면 돈지랄을 했고 돈 없으면 또 열등감에 쩔어 있었다. 앞에서는 저와 친해지려고 안달을 했으면서 뒤에서는 온통 씹어댔다. 걘 기만자야. 취미로 음악 하는 주제에 인생 조온나 쉬운 거지. 배가 쳐불렀다니까. 잘생기고 집 좀 사는 게 내 잘못이야? 남들도 자기랑 똑같이 불행하지 않으면 억울해? 존나 꼴사나웠다.

 

그래서 아무도 안 믿기로 했는데. 사람은 거짓말을 하지만 돈은 거짓말을 안 하니까, 사람을 믿느니 차라리 돈을 믿기로 했는데. 재현은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고 혼잣말을 내뱉었다.

 

 

못 오나보네...”

 

 

영훈과 만나기로 한 약속 시간은 애저녁에 지나있었다. 어차피 약속은 깨지라고 있는 거니까 별로 기대하지는 않았다. 근데도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 건, 김영훈은 또 약속은 깨지라고 있는 것이라는 우리나라의 불문율 같은 건 모를 테니까, 아무래도 올 것 같아서. 그냥 혹시나 싶었던 거다. 핸드폰도 없다고 하니 연락을 할 수도 없고, 만나기로 한 용산역 의자에 앉아 대충 핸드폰을 보며 시간을 때우던 재현은 결국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바람 맞은 것 같았다. 이런 건 또 처음이네. 그렇게 생각하면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역을 나가고 있었는데.

 

그런데 혹시가 역시가 되고, 멀리서도 눈에 띄는 김영훈의 하얀 얼굴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너 뭔... 꼴이 왜 그래?”

 

 

재현은 또 말문이 턱 막힌다. 택시에서 내리는 영훈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가 죄다 젖어 있다. 게다가 발은 또 맨발이었다. 지가 무슨 신데렐라도 아니고, 신발은 어디에 팔아먹고 맨발로 오는 거야. 재현이 입고 있던 야구잠바를 벗어서 영훈의 어깨에 둘렀다.

 

이재현은 참 많은 것들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 중에서 인생 사는데 가장 쓸모 있다고 생각했던 건 사람을 견적 내는 능력이었다. 대충 눈만 보면 알았다. 얘가 어떤 애인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예상한 것들은 거의 다 맞아떨어졌다. 그만큼 속이 빤히 보였다는 것이다.

 

재현은 습관처럼 영훈을 넘겨짚었다. 첫째, 오다가 굴렀다. 둘째, 갑자기 소나기가 와서 쫄딱 젖었다. 셋째, 모르고 물벼락을 맞았다. 그런데 재현의 그 모든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고, 그 하얗고 고고한 얼굴로 영훈이 내뱉은 말은 전혀 예상 밖의 것이어서.

 

 

나 집 나왔어...”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도대체 왜? 재현이 버석하게 마른 입술을 버릇처럼 핥으면서 영훈을 쳐다봤다.

 

 

네가 기다릴까봐...”

 

 

, 너는 어떻게 된 애가... 재현은 이제 영훈의 얼굴을 마주보고 있으면 도대체 무슨 생각을, 또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몰랐다. 저 순한 얼굴 앞에서는 자꾸만 제 안의 무언가가 휘청거렸다. 과거의 이재현이었으면 하지 않았을 행동들이 튀어나왔다.

 

이재현이 다정한가? 지 기분 좋으면. 이재현이 사람 우는 것에 약한가? 절대 아니다. 근데 왜 나는 얘한테 다정해지고, 얘가 울면 약해질까? 재현은 확인하고 싶었다. 저와 영훈 사이에 흐르고 있는 그 뭐라 정의내릴 수 없는 감정을.

 

 

잠깐 확인할 거 있으니까 그냥 가만히 있어.”

 

 

그렇게 말한 재현이 제 앞에 서 있는 영훈에게로 다가가서, 어깨를 당겨 영훈을 끌어안았다. 키가 커서 살짝 굽혀지는 무릎, 제가 안으면 안는 대로 딸려오는 몸이 마냥 가벼웠다. 심장이 쿵쿵거리면서 뛰었다. 축축하게 젖은 몸인데 맞닿은 체온은 뜨거웠고, 훅 숨을 들이쉬면 코로 들어오는 체향은 달았고,

 

꼭 끌어안았던 품을 떼고 김영훈을 쳐다봤을 땐, 생전 처음 보는 눈동자가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가 어지럽다. 영훈과 제 사이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바람이 분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애써 누른 재현이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 뭐 초능력 같은 거 있지?”

?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 게 아니면 내가 너를 왜 좋아해.”

 

 

나는 아무도 안 좋아하는데. 전에 사귀었던 애들도 다 그렇게 말했었다. 너는 평생 누군가를 좋아할 수 없을 거라고.

 

숱한 이별을 하며 들었던 말들이 재현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그렇게 쿨한 것도 유전이냐? 근데 이재현 너 그거 쿨한 거 아니야. 너 진짜 이기적이야. 재현아, 넌 사랑을 몰라. 그런 말들을 들을 때면 재현은 우스웠다. 참나, 대충 꼴리면 사랑이지. 뭐 별 게 사랑인가.

 

어떤 인디밴드의 노래 가사처럼 사랑도 끼리끼리 하는 게 맞는데. 사랑 같은 거 유행 지난 지 오래라서, 되도 않는 사랑타령은 구닥다리들이나 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랑도 라디오와 같이 끄고 켜고 싶다고 하는 게 현대인의 사랑 아닌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쓸 데 없는 감정 소모는 배제한 채로, 사랑도 내 편의에 맞춰서. 그런 게 자본주의의 사랑 아닌가.

 

그렇지만 지금까지 해왔던 게 사랑인가, 물어보면 답할 수 없다.

 

 

김영훈, 너 대체 나한테 뭔 짓 했냐...?”

 

 

사랑에 빠지는 건 이유가 아니라 순간이라고 했다. 어떤 한 순간이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사랑해왔던 모든 것들을 다 과거로 바꾸고, 혼자서만 현재로 남아있는 그 얼굴. 이제 제게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밖에 없었다. 사랑하거나, 혹은 더 사랑하거나.

 

숱한 노래 가사와 영화, 책과 드라마와 애니메이션 속에서 범람하는 사랑은 언제나 동어반복일지라도. 사랑이 아무 것도 구원할 수 없는 요즘 같은 시대에, 지금 제가 부리고 있는 것은 청춘의 패기가 아니라 객기일지라도.

 

그런데 눈앞의 그 희끄무레한 얼굴을 보면 모든 것들은 다 표백되고 우리만 남는다. 재현은 확신이 생긴다. 지금 너를 놓치면, 다시는 너 같은 애를 만나지 못할 거라고. 놓치고 싶지 않았다. 재현이 영훈에게 성큼 다가섰다.

 

청순한 얼굴로 제가 아니면 안 된다는 표정을 짓는 눈동자, 여름, 청춘, 사랑이 이재현의 바로 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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