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의 형태
마음을 울리면
이재현 x 김영훈
그 땐 그런 때였다. 엄마랑 아빠가 하는 말이 다 짜증나는 것 밖에 없었고 집에 오면 방에 쳐 박혀 있고 싶기만 했다. 누나가 시비를 거는 게 짜증이 나 울컥하는 마음에 소리를 꽥 지르면 엄마가 쟤 왜 저러니 하며 재현을 꾸짖고 누나는 냅둬. 꼴에 사춘긴가봐 하며 얄밉게 재현을 째려보던 그런 때였다. 그 날도 여전히 엄마 잔소리는 듣기 싫었고 누나는 얄미웠다. 분명 작년까지 아무렇지 않게 다녔던 것 같은데 요즘 따라 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이리저리 만져 봐도 나아지질 않아 구린 기분으로 학교를 갔고 친구새끼들과 수업시간에 떠들고 키득대다가 또 담임선생님한테 혼나고 복도 끝에서 벌을 서던 그 날, 재현은 그 애를 처음 봤다.
동그란 뒤통수에 가는 뒷목, 제법 큰 편인 키와, 긴 팔 긴 바지에 가려져 있지만 살짝 드러난 팔목과 발목부터 마른게 느껴지는 몸, 쭉 뻗은 팔과 다리가 우리 학교에서는 처음 보는 인영이었다. 두리번거리던 뒤통수가 돌아간 그 자리에는 갸름한 얼굴과 동그랗고 까만 눈이 있었다. 마주한 나를 보더니 그 애는 가방을 뒤적거리다 연필과 하늘색 스프링노트 하나를 꺼냈다.
「안녕? 혹시 교무실이 어디야?」
적힌 글씨도 제 눈처럼 동글동글했다.
“건너편 건물 1층...”
재현을 보던 그 애가 아 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또 다시 노트에 글자를 적기 시작했다.
「고마워 !」
아침부터 이어온 짜증이 가시질 않고 또 찾아왔다. 재현은 말은 않고 글자만 적다가 사라진 그 애가 짜증이 났다. 하늘색 노트와 잘 어울리는 하얀 손이나 곱상하게 잘생긴 얼굴 속에서 나를 쳐다보는 그 동그란 눈동자가 처음 보는 주제에 어딘가 재현을 간지럽히고 있는 것 같아서. 재현은 알 수 없는 짜증에 애꿎은 미간만 찌푸렸다.
“다들 조용. 우리 반에 친구 한 명이 전학 왔다.”
쉬는 시간이 되자 재현은 교실에 들어올 수 있었고 3교시 끝나고 내려갔던 담임선생님이 누군가 함께 들어왔다. 아까 그 애였다. 담임선생님이 그 애한테 분필을 쥐어주면서 자기소개를 해보라고 했다.
「 내 이름은 김 영 훈 이야. 잘 부탁해. 」
“영훈이는 소리를 듣지 못해. 그래서 말도 못하고. 너희들이 앞으로 많이 도와줘야 할 거다.”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그 애 뒤로 담임의 무미건조한 멘트가 공중으로 퍼졌다. 그 뒤로 웅성거리는 반 아이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제 서야 재현은 그 하늘색 스프링노트가 왜 꺼내어졌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마침 재현의 앞자리 빈 탓에 그 애, 아니 영훈이 그 자리에 앉게 되었다. 영훈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재현은 그 때부터 영훈이 신경이 쓰여 머리가 아팠다.
열세 살은 미성숙하고도 미성숙했다. 제멋대로 커버리려고 하는 몸과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는 어린애들은 깊이 생각하는 법조차 여러 번의 학습이 필요했다. 학습이 부족한 아이들은 그저 동물의 본능처럼 약자를 표적으로 삼기 시작했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한다는 건 그들 앞에 큰 약점이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으나 아이들은 크고 작게 영훈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따돌림부터 시작해서 물건을 빼앗는다던지, 듣지 못한 다고 욕을 하거나 모욕적인 언행을 행사하는 건 예삿일이었다. 영훈이 사람의 입 모양으로 어느 정도 말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은 그들 안중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 재현이 있었다.
재현은 영훈을 괴롭혔다. 딱 그 또래 사내아이처럼 활발하고 장난기 많은 재현 주변엔 늘 아이들이 많았다. 재현은 또래 친구들 사이에 항상 중심에 있었고 그를 좋아했으며 즐겼다. 그런 재현이 영훈 괴롭히기에 앞장서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재현에게 영훈은 처음 봤을 때부터 알 수 없게 본인을 이상하게 만드는, 기분 나쁜 존재였음에 재현의 영훈을 향한 나쁜 행동들은 멈춰지지 않았다.
재현이 영훈을 괴롭히는 것을 멈출 수 없던 건 영훈의 태도에도 있었다. 짜증을 내거나 얼굴을 구길 만한데도 언제나 늘 평온했다. 특히 재현을 바라보고는 살짝 미소도 지었다. 그럴 때마다 재현은 당황스러웠다. 왜 웃는 거야 대체. 작은 얼굴에 자리 잡은 작은 입이, 까맣고 동그란 눈동자가 자리한 그 눈이, 재현을 바라보고 휘어질 때마다 재현의 마음까지 휘어져 버리는 것 같아 재현은 영훈이 싫었다.
그러다 사건은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재현의 생일이라 아침 메뉴가 미역국이었다는 것만 빼면 평소와 같은 일상의 하루였다. 반에 들어서자 아이들의 축하 한단 말들과 선물을 주는 아이들도 있었고, 생일빵이라며 장난스럽게 재현을 공격하던 애들도 있었다. 한창 그러고 있는 와중에 재현의 앞자리에 앉은 영훈이 가방 속에서 상자를 꺼내 뒤를 돌아 재현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재현의 생일은 어떻게 알았는지 생김새가 딱 선물 상자였다. 놀란 재현이 얼굴을 붉히며 멍해 있자 주변 아이들이 상자를 열어 보았다. 한눈에 봐도 값 비싸고 맛있어 보이는 초콜릿 세트였다. 영훈도 수줍었는지 시선을 한곳에 두질 못했다. 오오 이재현! 하는 웃음 섞인 환호가 주변으로부터 들려오자 재현의 얼굴은 더욱 더 새빨개졌다.
“니…니가 뭔데 나한테 이걸 줘!”
“병신이 너 좋아 하나봐. 이재현 좋겠다? 크크…”
험한 말을 내뱉으며 조롱하는 친구들의 말을 들으니 재현의 창피함이 극을 달했다. 재현은 그대로 영훈이 준 상자를 들고 가 창가에 내던졌다. 싸해진 분위기 사이로 얼굴이 울그락붉그락 변해버린 재현과 주먹 쥔 손을 벌벌 떨고만 있는 영훈이 있었다. 그리고 그냥 웃고 지나가던 평소와 다르게 영훈이 벌떡 일어나 재현을 밀쳤다. 영훈으로부터 받은 공격에 재현도 맞서 싸웠다. 호기롭게 먼저 덤볐던 것과 다르게 키만 컸지 요령은 없던 영훈이 재현에게 밀리기 시작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대항했다. 둘의 싸움은 반 아이들이 교무실에 내려간 선생님을 불러와 끝이 났다. 씩씩거리며 일어난 재현과는 다르게 일어나지 못하고 끙끙 거리던 영훈은 양호선생님의 팔 골절 의심 진단을 받고 병원으로 이동했고 재현과 영훈의 어머니들은 학교에 호출되었다.
사건의 여파는 컸다. 재현은 태어나서 제일 크게 엄마에게 혼이 났다. 생일이었지만 케이크를 볼 수도, 초를 불수도 없었다. 몸이 불편한 친구를 괴롭힌 재현 에게 엄마는 여태껏 처음 보는 눈빛과 처음 보는 말투로 재현을 호되게 혼을 냈다. 재현이 눈물 콧물을 펑펑 흘릴 만한 상황이었지만 재현은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영훈은 학교에 나오질 않았다. 며칠 뒤 담임선생님의 영훈이 전학을 가게 되었다는, 또 무미건조한 그 말만 교실에 울려 퍼졌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서 엄마가 호되게 혼낸 것이 무안할 정도로 재현은 사흘 밤낮을 앓았다. 고열과 감기 몸살로 난생 처음으로 학교도 결석해봤다. 열병을 털고 일어난 재현이 엄마에게 제일 먼저 한 말은 수화를 배우고 싶다는 말이었다. 재현의 말에 재현의 엄마는 어쩐지 그 새 수척해지면서 키가 조금 자란 듯한 재현을 안아주며 그렇게 하자고 했다. 버스를 타고 1시간이 좀 안되는 먼 거리를 다니면서까지 재현은 수화를 배웠다. 모자른건 인터넷 동영상을 찾아볼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그렇게 재현은 교복을 입는 열네 살이 되었다.
사건은 이상하게 와전이 되었고 그것은 재현이 중학교를 입학해서까지 재현의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이재현이 싸움을 잘해서 귓병신을 팔병신까지 만들어 놨다고, 이재현은 엄청 쎄고 무서운 아이라고. 실제로 소위 말하는 노는 아이들이 접근해 재현은 초반엔 그들과 같이 어울려 다니다가 이내 점점 멀어졌다. 갑갑하고 어딘가 불편한 느낌이 참기가 힘들었다. 항상 왁자지껄하고 대장이 되길 좋아했던 재현은 여전히 밝지만 어딘가 변해있었다. 재현의 키가 한 뼘씩 커져가는 만큼 재현은 점점 자라고 있었다. 그렇게 재현은 나름 열병 같은 사춘기를 보냈다.
영훈이 떠나고 재현이 열병을 앓던 그 때, 재현은 영훈의 꿈을 꾸었다. 뒷모습. 얼굴보다 더 하얗던 발목과 팔목엔 살집이라곤 없는 그 모습이 영훈임을 잘 보여주었다. 재현이 영훈을 처음 봤을 때 그 때의 모습 그대로 동그란 뒷통수와 길쭉한 몸체가 재현의 시야에 잡혀있다가 뒤를 돌면 보이는 그 얼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안좋았던 끝만남과는 상이하게. 그 이후에도 재현은 그 꿈을 이따금씩 꾸었다. 웃고 있는 영훈이 등장하는 건 어쩌면 비겁한 자기합리화나 자기위안의 일종일지도 모른다고 재현은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번엔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원래도 큰 편이었던 키가 더 커져 자라있어도, 세월이 지나 더 성숙한 외형을 띄고 있어도, 여전히 소매 끝에 보이는 발목과 팔목이 하얗고 말랐으며 뒷통수는 동그랬다. 영훈이었다. 5년 전 재현의 곁에서 사라져 가끔 꿈에서만 만날 수 있었던 그 영훈이 지금 재현의 눈앞에 있었다.
재현의 수화를 가르쳐주던 선생님께서 재현의 동네 복지관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인사를 드릴 겸 들린 곳이었다. 선생님을 만나고 나오는 길에 이제는 처음 보는 인영이 아닌, 오랜 만에 보았지만 익숙한 그 인영이 재현의 눈앞에 있었다. 영훈 또한 재현을 알아 보았는지 커다래진 눈과 당황스러운 표정을 하더니 발걸음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재현이 붙잡을 새도 없이 긴 다리로 성큼성큼 사라져버린 영훈의 모습을 보고 혼자 남은 재현이 멍하니 서있었다.
영훈을 다시 만나야 했다. 이유는 재현도 잘 몰랐다. 그냥 만나고 싶었다. 사과도 해야 했고. 밤새 고민하던 재현이 학교를 마치자마자 발걸음을 어제 영훈을 마주한 곳으로 옮겼다. 어제보다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가 아직 수업이 끝나지 않았는지 건물 내부가 조용했다. 복도 쪽을 서성이는 재현의 눈에 벽에 기대어 앉은 남자애 한명이 보였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옷은 인근 중학교 교복 차림이었다. 교복 소매가 겅중 짧은 듯한 느낌에 작지 않은 키를 보니 3학년인 듯 했다. 목에 건 카메라를 들여다보던 남자애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재현을 쳐다보았다.
"저... 이거 언제 끝나는지 알아요?"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데요?"
"아... 사람을 좀 만나러 왔는데..."
"누구? 혹시 김영훈?"
"김영훈 알아요?"
남자애 입에서 바로 영훈의 이름이 나오자 재현이 놀란 표정을 했다. 짙은 쌍꺼풀에 커다란 눈망울과는 다르게 어딘가 반항기 어린 표정과 눈빛의 남자애가 재현의 명찰을 슥 보더니 경계의 눈빛으로 재현을 쳐다보았다.
"김영훈 내 애인인데? 너 뭔데 김영훈 찾아?"
".....애인?!"
"그래. 애인. 남자친구. 나 김영훈이랑 사귄다고. 21세기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성소수자 핍박하고 멸시하고 그러는 거 아니지?"
반항기 어린 표정에 당당함까지 얹어진 남자애의 표정을 보고 재현은 당황스러움을 감출 순 없었다. 영훈의 애인... 남자에다가 중학생. 작은 키는 아니지만 그래도 키도 김영훈보다 훨씬 작아 보이는데... 그래도 커다란 눈이라던지 뚜렷한 이목구비가 제법 또랑하니 잘생겼다. 단순히 영훈의 애인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영훈과 같은 성별이라서가 아니라 영훈이 사귀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재현은 저도 모르게 좋지 않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재현의 시선 끝에 '김선우' 라고 쓰여 있는 명찰이 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수업이 끝났는지 어수선한 소리가 들려왔다. 짐을 챙기던 영훈이 창문너머의 재현과 눈이 마주쳤다. 놀란 듯한 표정이었으나 이내 평온한 표정으로 재현을 바라보던 영훈이 어제와는 다른 표정으로 교실 밖을 나왔다. 영훈이 밖을 나오자마자 남자애, 선우가 그 앞을 가로 막았다. 재현은 그 둘을 그냥 바라보고 서있었다.
쟤 누군데?
친구야.
형이 친구가 어딨어?
미안해. 나 얘랑 할 말 있으니까 먼저 집에 가.
싫어. 같이 들어갈거야.
선우는 수화가 능숙해보였다. 재현이 수화를 모를 것이라고 잠정적으로 생각한건지 둘은 편하게 수화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화를 할 줄 아는 재현은 둘의 대화를 보고 더 혼란에 빠졌다. 먼저 집에 가? 같이 들어 갈거야? 꼭 같이 살고 있다는 둘의 대화에 재현은 마음이 덜컹 했다. 영훈이가 애인이랑 동거까지?
왜 그래?
나 쟤 누군지 알아. 또 가서 쳐맞으려고 그래?
아니야. 그런거.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 바보야?
집에서 보자.
엄마한테 이를거야.
약간 짜증 섞인 표정의 영훈이 손을 들었다가 내려놓고는 선우를 쳐다봤다. 재현을 경계하는 듯한 눈빛과 말투, 그리고 둘의 대화를 통해서 재현은 선우가 저와 영훈이 사이 옛날에 있었던 일을 알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리고 엄마라는 단어가 나오자 재현은 의아해졌다. 엄마한테 이를거야가 여기서 왜 나오지? 정신없는 재현의 팔을 잡고 영훈이 선우를 지나쳐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건물 밖으로 옮겼다. 금세 따라 붙을 줄 알았던 선우는 그냥 영훈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자리에 선 영훈이 그제 서야 아차 싶었는지 재현의 팔을 붙잡은 손을 확 떼었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영훈이 등에 매고 있던 가방을 돌려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아마 노트와 펜을 꺼내기 위함 같았다. 그런 영훈을 재현이 저지했다.
“나... 수화. 배웠어.”
말과 함께 재현이 손을 들어 수화를 하자 영훈이 놀란 듯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그리곤 잠깐 망설이던 영훈이 답했다.
오랜만 이야.
“응. 나도 오랜만...”
키. 많이 컸다.
“그런가...”
재현이 나즈막히 혼자 중얼거렸다. 어색한 기류에 저를 칭찬하는 말까지 오니 재현은 견디기가 힘들었다.
어제는 못본 척 해서 미안해. 너무 오랜만이라 놀래서.
"아...괜찮아."
한참 동안 둘 사이에 정적이 이어졌다. 먼저 정적을 뚫은 건 영훈이었다.
바빠? 안 바쁘면 나랑 놀아주라.
영훈의 손에 이끌려 온 곳은 복지관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개천이었다. 몇 년 전부터 잉어도 풀고 꽃이랑 풀도 이것저것 심겨지고 벤치도 놓고 해서 동네사람들이 산책하러 많이 찾는 곳이었다.
물고기 보러 자주 오거든
물가 바위에 걸터 앉은 영훈을 따라 재현도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영훈이 부스럭거리며 가방에서 개천에 오기 전에 빵집 들러서 산 식빵을 꺼냈다. 작게 뜯은 식빵을 물에 던지니 잉어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뻐끔대던 입들이 식빵 조각을 하나하나 먹어 치우는 걸 보는 영훈의 표정이 뿌듯해 보였다. 이것 때문에 빵을 샀구나.
나 보러 온거야?
"어...? 어...응."
왜?
묻는 영훈에게 뭐라 답해야 할지 재현이 당황스러워 하자 영훈이 살짝 웃었다. 그 모습도 예전과 변함이 없었다.
꼭 수화 안해도 돼. 나 입모양 보면 웬만하면 다 알아.
"아, 그래?"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는 영훈을 바라보는 재현이었다. 영훈을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어쩌면 그것 때문에 수화를 배웠는지도 모른다.
".....사과 하러 왔어."
제일 먼저 하고 싶었던 말. 딴 곳만 쳐다보던 재현이 결심한 듯 마주 서있는 영훈을 바라보았다.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아 재현은 이번엔 손을 들어올렸다. 미간에 엄지와 검지로 동그란 원을 만든 손을 살짝 댔다가 손을 피며 내렸다. ‘미안해.’ 재현은 수화를 배우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입으로는 차마 내뱉기가 힘들었고 두려운 말이었으니까. 이거나 저거나 재현으로부터 나오는 메시지였으나 왠지 입을 떼는 것보다 손을 움직이는 편이 더 나은 재현이었다. 용기가 필요한 이유들은 많았다. 여러 생각이 있었다. 제가 사과를 하면 영훈의 반응은 어떨까. 응 그래 하는 단순한 반응 일까 아니면 사과? 이제와서? 내가 얼마나 괴로웠는데. 뻔뻔한 자식 등의 분노에 찬 냉소적인 반응일까. 후자 쪽에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재현은 많이 했었다. 5년이 지났지만 과거에 제가 저질렀던 일들은 제가 봐도 영훈에게 상처가 되기 충분했다. 하지만 상대는 김영훈이었다.
내가 더 미안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었다. 내가 더 미안하다니. 김영훈 니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 항상 웃던 예전처럼 재현의 얼을 빠지게 만드는 재주는 여전했다.
“니가 왜 더 미안하다는 거야?”
그 때, 내가 먼저 때렸으니까.
“나는 뭐 안때렸나...”
이유도 황당했다. 제가 먼저 때려서 그랬다니. 먼저 일을 자초 한 것도 재현이었고 조금 까지고 할퀴어진 자국이 전부였던 재현과 다르게 입안도 터지고 이곳 저곳 멍도 들고 팔까지 부러졌던 영훈이었다. 그리고 그 이전에도 크고 작게 영훈을 괴롭혔던 재현이었다. 예전 일을 생각하니 영훈에게 너무 미안함과 동시에 수치심까지 느껴진 재현이었다.
“......내가 밉지 않았어?”
뻔뻔하기도 한 질문이지만 재현은 묻고 싶었다.
나는 듣지 못하는 대신에 다른 걸 남들 보다 더 잘 볼 수 있거든. 네 눈이 항상 미안하다고 말하고 있었어. 난 다 보였거든. 그래서 너 안 미웠어. 게다가 넌 눈도 예쁘잖아. 반짝반짝.
환하게 웃는 영훈을 보고 부끄러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재현이 같이 피식 웃었다. 눈이 미안하다고 말을 했다. 본인도 깨닫지 못한 걸 알려주는 영훈 때문에 재현의 마음이 이상해졌다. 영훈이 들고 있던 빵 조각을 절반 떼어 간 재현이 영훈 처럼 작게 뜯어 낸 빵조각을 개천에 천천히 퐁당퐁당 던져 넣었다.
"아까 걔는 누구야?"
누구? 아 선우? 내 동생이야. 2살 어려. 열여섯 살.
머리에 뭔가 맞은 것처럼 재현은 띵했다. 동생. 김영훈의 동생 김선우. 그래놓고 뻔뻔하게 사귀는 사이라고 거짓말을 치다니. 눈치가 빠르다면 빠른 편인 재현도 속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훈과 선우는 닮은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눈코입 생김새는 물론이거니와 하얀편인 영훈과는 다르게 선우는 피부도 까만편이었고, 삐쩍 마르기만 한 영훈과는 다르게 선우는 말랐지만 탄탄한 느낌이 나는 체형이었으며 풍기는 느낌과 이미지까지 모든 게 달랐다. 하는 짓도 전혀 다르네.
안 닮았지? 다들 말하기 전에는 몰라. 나는 엄마 닮고 선우는 아빠 닮아서.
"그러게..."
아직 안갔을걸?
영훈의 말에 재현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개천 위에 있는 다리에 혼자 서서 사진기로 사진을 찍는 선우가 보였다.
내가 다른 사람들이랑 다르니까, 선우가 걱정을 많이해. 동생인데도 내 보호자처럼 행동하거든. 어릴 때부터.
계속 응시하고 있던 재현과 사진기를 내린 선우가 눈이 마주쳤다. 말만 안했지 뭘 쳐다봐 하는 듯한 표정의 선우를 보고 재현이 피식 웃음이 나왔다.
......
"응?"
자기 가슴께로 영훈이 손을 가져다대고 꼼질거렸다. 마치 무언가 망설이는 듯한 손짓이었다. 입술까지 자근자근 씹던 영훈이 이내 손을 움직였다.
......앞으로도 자주 놀러와.
"아..."
바쁘면 괜찮아.
"아...아니야. 자주...올게."
재현의 긍정의 답변을 읽은 영훈이 환하게 웃었다. 순간 재현은 영훈의 웃음이 이곳과 많이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해질녘 잔잔히 흐르는 개천, 바람에 살랑 이는 풀잎들과 나뭇잎가지들 사이로 비쳐 들어오는 노을빛이, 은은하게 퍼지는 풀내음이 정말로 꼭 닮아있었다.
"좋아 죽네..."
목을 무겁게 하던 카메라를 먼저 책상 위에 내려놓은 선우가 그에 반해 지나친 가벼움을 자랑하는 가방을 아무렇게나 바닥에 던지고는 침대에 누워 있는 영훈을 보았다. 집에 오자마자 옷부터 갈아입는 게 습관인 영훈이 옷도 갈아입지 않고 책상 위에 가방만 올려 놓고는 바로 침대에 드러 누웠다. 집에 오는 내내 연신 싱글 벙글 이었던 그 얼굴로.
엊그제 재현을 마주하고 영훈은 깜짝 놀랬다. 5년 전 그렇게 전학을 가버리고 영훈의 마음도 편한건 아니었다. 그리웠던 것도 사실이었고 재회를 꿈꿨던 것도 사실이었다. 영훈에게 재현은 특별했다.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영훈은 왠지 재현이 좋았다. 교무실을 알려주던 초롱초롱한 눈빛과 개구진 인상이 영훈에겐 처음부터 큰 호감이었다. 영훈과 정 반대로 재현은 그 반짝이는 눈을 빛내며 항상 주위에 많은 친구들과 함께했다. 장난기도 많고 리더십도 있었다. 게다가 운동엔 젬병인 영훈과는 다르게 체육시간만 되면 뛰어난 운동신경으로 반 아이들에게 박수를 받는 재현을 보며 영훈은 그 어린 나이에도 동경을 느끼기까지했다. 그런 재현과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너무 놀래서 자릴 피해놓고는 집에 와서 영훈은 밤새도록 후회하느라 밤에 잠도 못잤다. 뒤척이는 영훈 때문에 애꿎은 선우만 선잠을 잤다. 다음에 만나면 꼭 제대로 인사해야지 다짐하며 제발 다시 만날 수 있길 기도했던 영훈앞에 바로 다음 날 재현이 나타났고 영훈은 용기를 내어 붙잡았다. 방해꾼이 있었지만.
"걔랑 놀지마. 걔가 형 초딩 때 팔 부러뜨려서 전학가게 만든 새끼지?"
나쁜 애 아니야.
"그건 내가 판단해."
손베개를 한 채 방긋 웃으며 누워있는 영훈의 다리를 툭툭 치며 저를 보게 한 선우가 초치는 소리를 했다. 자신이 판단한다며 가뜩이나 부리부리한 눈에 힘을 주는 선우를 보며 영훈은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나 걔한테 형이랑 사귄다고 했는데."
놀란 영훈이 스프링처럼 벌떡 하고 일어났다. 침대에 걸터앉아있던 선우가 부딪힐까 놀래서 몸을 뒤로 쓱 뺐다.
왜 그랬어?????
"위협을 주기 위함이었지? 게이라고 하면 질색하고 도망갈 거 같아서. 근데 아까 분위기를 보면 잘못된 작전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뭐냐 니네?"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영훈이 다시 침대에 철푸덕 누웠다. 그래서 아까 선우가 동생이라고 했을 때 재현이 표정이 그랬구나. 영훈은 아까 상기된 얼굴로 자신에게 미안하다며 사과를 하는 재현의 모습을 떠올렸다. 수화를 배웠을 줄은 몰랐는데. 열심히 움직이던 적당히 마디가 불거진 가늘고 긴 재현의 손은 무척이나 예뻤다. 어릴 땐 조금 작은 편이었던 키가 언제 훌쩍 큰건지 거의 영훈과 비슷해진 것도 놀라웠다. 예쁘장하게 잘생겼던 5년 전의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개구진 모습이 가득했던 그 때와는 다르게 제법 짙고 날렵해진 이목구비와 얼굴선이라던지, 교복셔츠에 비춰 보이는 넓은 어깨나 가슴팍들이 무척 남자다워졌음을 보여주었다. 예쁘게 반짝이던 눈은 그대로였다. 재현을 떠올리던 영훈의 얼굴이 점점 달아올랐다. 손베개를 만들어 누워있던 영훈이 몸을 돌려 엎드려버렸다. 씻고 자라는 뜻으로 영훈의 엉덩이를 쿡쿡 찌르는 선우의 손길에도 영훈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인사치레가 아니었는지 재현은 거의 하굣길 도장 찍듯이 영훈을 만나러 왔다. 처음엔 괜시리 부끄럽고 어색해서 망설였지만 알았다는 자신의 말에 세상 환하게 웃던 영훈을 생각하니 발걸음이 옮겨졌다. 그 얼굴을 다시 보고싶기도 했고. 가끔 시간이 남으면 빵집에서 빵을 사오기도 했다. 그러면 준비했는지 항상 영훈이 가방에서 초코우유 두개를 꺼내곤 했다. 허쉬드링크.
그동안 알게 모르게 서로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 재현은 인근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으며 엄마 아빠 누나 강아지 다롱이와 복지관에서 버스 세정거장 거리에 아파트에 산다는 것, 영훈은 선우가 태어난지 얼마 안되었을때 사고로 돌아가신 아빠 때문에 엄마랑 선우랑 셋이서 이 근처 빌라에서 산다는 것, 영훈은 중학교 2학년 때 자퇴를 하고 중졸 검정고시를 거쳐 고졸검정고시 준비중이고 복지관에선 바리스타 자격증 수업을 듣는 중이라는 것 등 서로 이것저것 이야기 하다 보니 제법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서로 폰번호도 알게 되어서 메시지도 간간히 주고 받았다.
백일 좀 지나고 열이 심하게 났는데 그 때 청력을 잃은거래. 돌아가신 할머니가 알려주셨어.
"아..."
너는 되고 싶은 거 없어? 하고 싶은 거라던가.
"음...딱히?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 줄 모르는데 미래 설계 해봤자... 그거 다시 수정하려면 머리만 아파."
멋있다.
"별...별걸 다..."
나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살아.
재현이 사온 바게트 빵을 뜯어서 물에 던져 넣는 영훈을 흘깃 재현이 바라보았다. 덤덤한 표정이 어딘가 재현의 마음을 짠하게 했다.
학교 재밌어?
"아니."
거짓말. 넌 인기도 많을거 같은데?
"나 인기없어. 이제 친구도 없어."
진짠데. 재현의 말을 농담처럼 받아들인 영훈이 눈꼬리가 휘어지게 활짝 웃었다. 예전처럼 재현의 마음까지 휘어버리게 만드는 웃음이었다. 영훈에게 학교를 왜 그만 두었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재현은 접었다. 굳이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아서였다.
재현은 영훈과 함께 학교에 가는 상상을 했다. 본인과 같은 교복을 입은 영훈. 말라서 그렇지 키도 크고 다리도 길어서 무척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영훈과 일렬로 자전거를 타고 등 하교를 하고, 아, 위험하니까 내가 항상 뒤쪽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다. 같이 매점에서 아이스크림 사서 나눠먹고 하교 길에 자전거 대놓고 이곳에 와서 또 같이 물고기 밥을 주는 것이다. 영훈을 닮은 이곳에서 영훈과 함께.
해 졌다. 가자.
영훈을 보고 재현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는 걸 도와 달라는 듯 웃으며 영훈이 재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재현이 손을 잡아 영훈을 일으켜 세웠다. 영훈을 잡았던 손이 뜨거워진 것 같았다. 그 열감은 늘상 있던 것과는 달랐다. 재현은 아까 영훈에게 말을 잘못했다고 생각했다. 하고 싶은 거, 있다. 영훈과 같이 일상을 공유하는 것. 함께하고 싶었다. 영훈과 모든 것을. 이제는 내가 지켜줄 수 있는데.
"이재현이냐? 존나 오랜만이네."
"어...김도형.“
집에 가기 위해 계단을 올라 다리를 지나던 참이었다. 재현과 영훈 앞에 마주 오던 사람이 멈춰 섰다. 재현과 다른 색의 교복을 입고 있었지만 이 근방 학교 교복은 맞았다. 도형은 재현과 같은 초등학교를 나온 애였다. 6학년 때 같은 반이라 재현과 꽤 친했었다. 다른 중학교를 가서 연락이 끊겼었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불량한 아이들과 친해져 어울려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소문이 거짓만은 아닌지 차림새나 행세가 제법 날티가 났다. 재현과 6학년때 같은 반이었던 영훈도 아마 도형을 알 거라 생각하고 영훈의 얼굴을 쳐다본 재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랫입술을 잘게 깨문 채 잔뜩 경계하는 표정을 하고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고 있었지만 영훈은 떨고 있었다.
"뭐냐, 이재현. 너 상혁이랑도 이제 안다닌다며. 태규는 쌩깐지 오래고. 그래놓고 같이 다니는게 저 병신이냐?"
"말 가려서해 씨발새끼야."
"뭐야 니네? 존나 웃긴다. 크큭... 야, 김영훈 너도 존나 오랜만이다? 니 병신이어도 내 말 다 알아듣지? 씨발 나 니네엄마가 중학교때 존나 난리 쳐서 징계먹은거 생각하면 아직도 자다가 깰 정도로 빡쳐. 아냐?"
"근데 이 새끼가..."
욱한 재현이 도형 쪽으로 다가가려고 했으나 재현의 팔을 영훈이 잡아끌었다.
"혼자 개과천선 한 척 존나 역겹네. 야, 이재현. 정신 차려. 뭔 김영훈이야. 너랑 수준 맞는 애랑 다녀. 응? 어울리는 애랑 다니라고."
재현은 화가 났지만 재현의 팔을 쥔 영훈의 손에 힘이 빠지질 않아 재현과 영훈을 비웃으며 제 갈길 가는 도형을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화를 삭이며 재현이 영훈을 보았다. 고개를 숙인 영훈 때문에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제법 힘있게 계속 제 팔을 쥐고 있는 영훈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도형의 말 속에서 대충 유추 할 수 있었다. 영훈과 도형이 같은 중학교를 다니고 도형이 속한 무리에게 영훈이 괴롭힘을 당했다는 것. 재현은 영훈의 손을 떼어내고 팔을 들었다.
너네 집 어디야? 오늘은 내가 더 데려다 줄게.
말없이 수화를 하는 재현을 영훈이 말없이 바라보더니 걸음을 뗐다. 재현이 영훈 보다 한발자국 보단 살짝 더 가까운 뒤에서 영훈의 발걸음을 따라 걸었다.
"조심해...!!!"
멍하니 걷다가 옆에서 오는 자전거를 미쳐 보지 못한 영훈에 재현이 소리가 먼저 나갔다. 그리고 이어 재빠르게 영훈의 몸을 강하게 잡아끌었다. 소리치기 전에 먼저 몸부터 움직일걸. 영훈이는 들을 수가 없는데. 재현이 그렇게 생각하고 영훈을 바라보았다. 놀란 듯 영훈의 큰 눈이 더 커졌다가 이내 제 크기를 찾았다. 그리고 어딘가 서글픈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영훈의 빌라 앞에 도착할 때 까지 재현과 영훈은 서로 말이 없었다.
씻고 옷을 갈아입고 바로 잠을 청하려고 했다. 하지만 오늘 밤엔 잠이 영훈에게 찾아오지 않기로 한 건지 영훈은 도통 잠이 오질 않았다.
생각 없이 살기로 했다. 영훈이 택한 생존 방법이었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그리고 깊어질수록 모든 것이 영훈이 존재하기 힘들게 만들 것이 뻔했다. 뜻대로 잘 되고 있다고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재현을 다시 만나면서 그게 잘 되지 않기 시작했다. 영훈이 재현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재현의 대한 마음 또한 점점 커져갔다. 단순한 친구관계를 넘어 그 이상의 마음이라는 건 부정하려고 해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문제는 재현도 과연 영훈 본인과 같은 마음일까 하는 것이었다.
재현은 착했다. 그 어린 날의 재현은 짓궂고 장난기가 많았지만 가만 보면 친구들을 위해 대부분 맞춰주는 편이었다. 영훈을 괴롭히면서도 어쩔 줄 몰라 하던 열세 살의 재현의 눈이 아직도 영훈의 기억 속에 선하다. 동정과 연민. 과거의 대한 참회. 재현에게 있어서 영훈은 단순히 그것일 수도 있었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영훈은 재현을 떠올렸다. 큰 키에 보기 좋은 뼈대를 자랑하는 탄탄한 몸은 같은 남자가 봐도 멋있었다. 게다가 빚은 듯이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성격까지. 여전히 운동도 잘할 거고 주위에 사람들도 많을 거다. 알면 알수록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재현은 빛이 나는 사람이었다. 수준 맞는 애, 어울리는 애... 영훈은 바로 누워있던 몸을 모로 돌려 한껏 웅크렸다. 다행히 선우가 거실에서 아직도 게임에 매진하고 있는 듯 했다. 베갯잎이 젖어갈 수록 영훈은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자꾸만 생각에 젖어갔다.
그 일이 있은 후 시간은 흐르고 일상은 계속해서 반복 됐다. 여전히 재현은 학교를 다녔고 영훈은 수업을 들었다. 그리고 늘 그랬던 것처럼 재현은 영훈을 찾아왔고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이전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재현은 묘하게 바뀐 영훈의 분위기를 눈치 챘다. 웃는 횟수도 줄고 말수도 줄었다. 걱정이 되었지만 또 눈에 띄게 바뀐 것은 아니라 왜 그러냐고 적극적으로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멍하니 앉아있는 영훈의 가방 지퍼가 반 쯤 열려 있었다. 삐져나온 노트가 재현의 눈에 들어왔다.
"노트 아직도 가지고 다녀? 폰으로 보여주면 되잖아."
응. 이게 어릴 때부터 익숙해서 그런지 편해.
"하늘색이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이야.
그러고 보니, 예전에 재현과 영훈이 복도에서 처음 마주 했을 때 영훈이 꺼냈던 노트도 하늘색이었다. 디자인은 달라졌지만 여전히 색은 같은 하늘색 빛을 띄는 노트.
하늘은 색이 너무 예뻐. 그거 흉내낸 색이니까.
"바다는?"
바다? 바다도 하늘 닮은 푸른 빛이니까... 사실 실제로 본 적이 없어서.
"바다 가본 적 한번도 없어?"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는 영훈이었다. 잠시 멈칫하던 재현이 이내 결심을 한 듯 영훈을 툭툭 쳤다.
"우리 바다 보러 갈래?"
재현의 말에 놀란 듯 눈이 똥그래진 영훈이 재현을 보았다. 아니 뭐 기차타면 생각보다 금방이기도 하고 나도 안간지 오래됐고... 부끄러운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우물우물 말하는 재현이 무슨 말을 하는 지 잘 읽히지 않아 영훈이 고개를 갸웃 하며 재현을 따라 옆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 때문에 흠칫 놀란 재현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새로 생긴 기차 타면 1시간. 가자, 바다."
이번엔 제대로 본 영훈이 멍하니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더니 재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미소를 걸고 있던 영훈이었지만 어쩐지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 싱그러운 풀내음이 나질 않았다.
나는 너랑 친해지고 싶었어.
"응?"
6학년때.
"아..."
나는 아무도 안놀아 주니까, 애들이 놀고 있는 걸 구경하는 게 일상이었거든.
멀뚱히 눈만 깜빡이며 꼿꼿이 앉아있던 그 예전의 교실 속 영훈이 생각나는 재현이었다. 가서 말을 걸고 싶고 같이 놀고 싶고 했었는데 용기를 내지 못하고 도리어 삐뚤어지게 표현한 제 자신도 더불어 생각났다.
그런데 하루는 어떤 애가 곧 네 생일이라는 거야. 그래서 너한테 뭔가 주고싶었어.
예전에 이모가 사주셨던 초콜릿이 생각났어. 살면서 그렇게 맛있는건 처음이었거든. 꽤 비싸서 용돈을 다 털어가지고 샀지.
힘들게 산건데 내 마음도 몰라주고 그걸 갖다가 그냥 버린 네가 그 날은 너무 미웠어. 그래서 그랬던거야.
갑자기 그 날의 이야기를 꺼내는 영훈을 재현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영훈의 마음과 정성을 망친 자신을 생각하니 영훈을 계속 보고 있기 힘들었다. 미안해서. 그래도 계속 손을 움직이는 영훈을 재현은 참고 바라보았다.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나는 나만 생각 했었던 것 같아.
니가 창피할 거란 생각은 안한 거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주는 건데.
미안해.
할 말을 마친 영훈이 고개를 젖혔다. 제가 좋다고 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푸른색을 띄는 하늘이었다. 재현은 그런 영훈을 바라보았다. 뚜렷한 이목구비가 고운 선으로 잘 빠진 영훈의 얼굴로 저녁 하늘빛이 다 쏟아지는 것 같았다. 위로하는 법을 잘 모르겠어서,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몰라서 재현은 그냥 영훈을 그대로 보기만 했다.
약속한 시간이 1시간 가까이 지났는데도 나타나지 않는 영훈을 기다리던 재현이 결국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재현이 영훈과 함께 바다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마침 재현의 학교가 개교기념일이어서 아침부터 이동해서 갔다 오기 딱 좋은 날이었다. 기차표도 다 예매하고 개천 다리 위에서 만나기로 했었는데 영훈이 나타나질 않았다. 메시지를 여러 번 보냈는데도 답장이 없었고 읽은 표시조차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영훈은 아무 말 없이 이렇게 누군가를 바람맞힐 위인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음이 분명했다. 요 며칠 어딘가 예전보다 어두워 보이던 영훈의 모습들이 머릿속에 지나가면서 재현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영훈과 일전의 만남에서 나눈 이야기들을 생각하며 재현은 후회가 되었다. 뭐든 간에 일단 뱉고 볼걸. 뭐가 미안하냐고, 아니라고 나는 괜찮다고. 창피 하기는 커녕 나는 니가 늘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진심을 말해줄걸.
결국 빠른 걸음으로 걷던 재현이 이내 뛰기 시작했다. 일전에 도형을 마주하고는 같이 갔던 영훈의 집이 기억이 났다. 마구 뛰어 거의 근처 다다랐을 무렵 빌라 건물 베란다에 사람이 서있는 모습이 재현의 눈에 들어왔다. 이목구비가 보이지 않아도 영훈 임을 알 수 있었다. 그 때 8층이라 했던가. 재현은 미친 사람처럼 계단을 뛰어 올랐다. 정신없이 움직이던 재현이 정신을 차렸을 때 재현은 모든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 했다. 개교기념일이라 학교에 가지 않아서, 잠기지 않고 벌컥 열려버린 현관문이, 난간에 올라서려는 영훈을 더 늦기 전에 잡아 챈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안도하고 있을 때 재현은 뒤늦게 알았다. 올라가서 영훈을 쳐내다가 본인이 떨어져 버린 것을. 뒤늦게 뻗어버린 영훈의 하얀 손이 시선에 잡힌 것을 마지막으로 재현의 기억이 끊어져 버렸다.
재현이 여러 검사와 수술을 받고 입원을 하는 동안 영훈은 간단한 검사를 받고 귀가를 했고 소식을 들은 선우는 수업을 채 다 듣지 않고 학교를 뛰쳐나왔다. 있는 힘껏 내달려서 온 집 거실에는 엄마가 말없이 식탁에 앉아있었다. 울었는지 벌게진 눈을 한 엄마는 차오른 숨을 고르고 있는 선우를 바라보았다.
"병원에 다시 가봐야 할 것 같아. 형... 잘 지키고 있어. 부탁 할게."
"...형은?"
"방에.“
방을 향해 걷는 선우의 뒤로 엄마가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덜 고른 숨을 색색 쉬는 선우가 마른 침을 삼키고는 영훈의 방문 손잡이를 잡고 열었다. 해가 막 져서 어두워진 방안 침대 위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영훈이 선우의 눈에 들어왔다. 말라빠진 하얀 팔다리엔 이곳저곳 크고 작게 까진 상처들이 자리 잡혀 있었다. 형이 살아있다는 안도감과 재현에 대한 걱정을 비롯한 여러 가지 생각들이 선우 머릿속에 가득했으나 일단 안쓰러운 모습의 제 형이 눈에 들어오니 모든 생각들이 지워진 채 울컥 치밀어 올라 참아보려고 해도 눈물이 흘렀다.
"왜 그랬어, 왜...! 엄마랑 나는 어떡하라고... 왜... 형아, 형..."
영훈의 침대 위에 올라 수화를 같이 하며 울부짖던 선우가 그냥 모든 걸 멈추고 영훈을 세게 끌어 안았다. 선우의 눈물로 영훈의 어깨가 다 젖어가도 영훈은 울지 않고 선우의 머리만 조용히 쓰다듬었다.
선우야, 날 구하려다가 재현이가 떨어졌어. 정신 나간 사람처럼 신발도 못 신고 뛰쳐나와서 재현이를 보는데 피도 나고 정신도 못차리는거야. 재현이 빨리 병원 가야 되는데... 나는 119 전화도 못하고 도와 달라고, 신고 좀 해달라고 소리 치고 싶은데 나는 그게 안되잖아. 눈물만 흘릴 줄 알고 이상한 소리로 울부짖기만 할 수 있지 도와달라고 소리 칠 수가 없잖아. 결국 운 좋게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보고 도와주셔서 재현이 병원 갔는데... 선우야, 그런 거 때문에 그래. 그래서 그래. 그래서 죽고 싶었어. 그래서.
이 많은 말을 팔을 들어 전할 힘이 나지 않아 영훈은 그냥 계속 선우 머리만 만져주었다. 어둑한 방안에는 선우의 울음소리만 가득했다.
내리 5일을 잤다고 했다. 천운이 따랐는지 떨어지면서 어딘가에 걸렸던 것 같은데 그게 나무였었나 보다. 타고난 건강 체질이 이 때 능력을 발휘하는 건가 검사 결과 머리도 멀쩡하고 몸도 갈비뼈 몇 개 나간 거 빼고는 많이 다친 것도 아니었는데 재현은 입원한지 닷새가 되어서야 눈을 떴다. 재현이 눈을 뜨자마자 맞이한 건 재현을 붙잡고 우는 제 엄마와 누나, 애써 눈물을 참고 재현의 어깨를 도닥이며 괜찮냐는 말만 되풀이하는 아빠였다. 마음이 저릿했지만 그와 별개로 재현의 머릿속을 채우는 건 따로 있었다.
"...영훈이는?“
그들의 눈물이 잦아지기 시작하자마자 재현은 망설이지 않고 물었다. 영훈의 안부가 재현 에겐 무엇보다 궁금하고 걱정됐으니까. 돌아온 대답은 괜찮고 집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는 중이라는 말이었다. 안심이 들자 그제 서야 온 몸이 조금씩 쑤시는 것 같았다. 침대에 드러 눕자 하얀 병실 천장이 보였다. 그 날, 재현이 영훈을 구한 날, 재현이 영훈을 마지막으로 마주한 날 모습이 그 위로 그려졌다. 베란다 난간 위에 위태롭게 서있던 안쓰러운 그 뒷모습. 무엇이 너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러고 보니 그 때 얼굴을 제대로 보질 못했다.
"보고 싶다..."
재현이 하얀 천장에 영훈의 모습을 그렸다. 영훈을 지켰다. 자신의 마음도 모르고 영훈을 아프게만 했던 재현은 이제 없다. 재현은 약간의 뿌듯함과 큰 그리움을 안고 다시 눈을 감았다.
"...뭐야?"
"깼다 그래서 왔더니, 또 세상 모르고 자더라? 그렇게 많이 잤는데도 잠이 또 와?“
인기척이 느껴져 재현이 눈을 떴을 때 병실 창가에 기대앉아 허쉬드링크를 쪽쪽 빨고 있는 교복차림의 선우가 보였다.
"환자복 잘 받네."
"맥이는 거야, 칭찬 하는 거야?"
"할 말 없어서 하는 안부인사?"
"...너네 형은?"
"괜찮다고 말해줘? 내가 거짓말은 못하는데... "
"니 처음에 김영훈 애인이라고 구라쳤잖아. 당돌한 놈."
"금방 들켰잖아."
"그래서 영훈이 잘 있냐고."
"지 구하다가 니가 그 꼴이 났는데 걔가 괜찮겠냐? 안 괜찮아. 산송장처럼 지내. 근데 다신 그런 빠가 같은 짓은 안할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지."
괜찮지 않다는 말에 재현의 미간과 눈에 힘이 들어갔다. 걱정이 가득한 재현의 얼굴을 슥 보던 선우가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니네가 열세 살이었을 때면 내가 열한 살이었지? 2살 차이니까."
"알면서 계속 반말이냐?"
"그건 내 마음. 아무튼 그 때, 하루는 김영훈이 팔에 깁스를 하고 들어온 거야. 괴롭히던 새끼들은 늘 있었는데 팔까지 부러져서 온 건 그때가 처음이었거든."
"......"
"엄청 울면서 들어 오길래 나는 아파서 우는 줄 알았는데 엄마랑 싸우느라 우는 거였어. 엄마가 전학 보낼 거라고, 재현이는 못된 애라고 계속 그러는데도 김영훈은 울면서 엄마 옷자락만 잡아당기더라. 전학 가기 싫다고. 팔 부러져서 수화도 제대로 안되는데 그 바보가. 그 때 알았어 나. 니 이름. "
재현이 처음 선우를 봤을 때 본인의 명찰을 보고 선우가 경계하던 이유를 이제 알게 되었다.
"나 카메라로 이것저것 다 찍어. 근데 그 중에 인화해서 우리 집 벽에 붙여 놓는 건 죽은 곤충들 사진 뿐이야. 비둘기나 쥐도 있다. 정확히는 김영훈이랑 나 같이 자는 침실 벽면에."
덤덤하게 말하는 선우의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살짝 떨리기 시작 하는 것 같았다.
"그 흉측한 것들 보면... 김영훈이 무서워서 죽고 싶다는 생각 안할 것 같았어. 그냥 막연히."
"......."
"그냥 김영훈 사는게... 아무 것도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너무... 버거워 보이거든."
말을 잇는 선우의 목소리가 여전히 떨렸다. 눈에는 물기까지 느껴지는 듯 했다. 선우나 재현이나 영훈을 아끼는 사람들로서의 지레 짐작에 불과할 것이다. 영훈이 사는 세상은 영훈만 온전히 알 수 있을 것이 당연하니까. 하지만 곁에서 지켜보기에도 특히 태어날 때부터 영훈과 가족으로 함께 한 선우는 가장 곁에서 모든 걸 지켜봤을 것이다. 아마 온전히는 아니어도 영훈을 제외하고 세상에서 가장 영훈을 이해하는 사람 아닐까 재현은 생각했다.
"씨발, 하나밖에 없는 친동생보다 지 괴롭혔던 저 새끼가 김영훈 목숨 붙잡는데 일가견이 있다니. 뭐가 좋다고."
이내 떨리던 목소리가 들어가고 선우 특유의 반항기어린 표정과 말투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뭘 말하려는지 망설이던 선우가 뒷머리를 몇 번 벅벅 긁더니 입을 뗐다.
"...고맙다고. 형 살려줘서."
"아....."
"빨리 퇴원해서 김영훈 좀 만나면 안돼? 김영훈은 너 보러 못 오겠대. 미안해서. 그러니까 니가 김영훈 보러 와라. 이왕 살린 거 계속 좀 책임져 봐. 원래도 허옇고 말랐는데 요새 통 밥도 잘 안먹고 산송장이라니까? 키만 커갖고."
"니가 안 시켜도 그럴 거야."
"어쨌든 난 할 말 다 했으니깐 간다. 자 몸보신용 선물. "
남은 허쉬드링크 하나를 침대위에 툭 던지고는 그대로 병실을 빠져나가는 선우다. 동그랗게 생긴 뒷통수 빼고는 도통 김영훈과 닮은 점이 하나도 없다고 또 생각하는 재현이었다. 아 허쉬드링크 좋아하는 거. 그거 하나 더 있다. 영훈이도 맨날 주던 건데. 좀 먹어보려고 빨대를 뜯었는데 빨대가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속으로 작게 욕을 한 재현이 몸을 뉘이고 조심해서 팔을 늘어뜨리고 손으로 빨대를 찾았다. 몸이 말썽이니까 이딴 것도 확확 하기가 힘들다. 손으로 더듬는데 빨대 말고 뭔가가 손에 걸렸다. 재현이 빨대와 함께 그것을 집어 올렸다. 노트. 하늘색이었다.
익숙한 느낌의 노트를 펼치니 눈에 익은 글씨체들이 눈에 들어온다. 역시나 영훈의 것이었다. 영훈이 다녀갔었구나. 묘한 설렘과 함께 재현이 일기장을 훔쳐보듯 한 장 한 장 넘겨보았다. 크고 작은 글씨들이 드문드문 쓰여 있었다. 별다른 중요한 내용들은 없었지만 큰 글씨들의 내용은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하기 위함이었고 작은 글씨들의 내용은 메모나 혼잣말이었다. 슥슥 넘기다 보니 쓰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빳빳한 페이지 근처에 다다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입모양을 읽을 줄 알아요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정말 죄송합니다’
‘조금 있다가 가도 될까요?’
‘제가 있을 게요’
‘감사 합니다’
조금 커다란 글씨로 써놓은 대화들이 아무래도 영훈이 재현의 가족과 대화한 것 같아 재현은 기분이 이상했다. 글씨가 써져있는 마지막 페이지는 작은 글씨들이 이곳저곳 줄을 맞추지 않고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러나 휘갈긴 글씨가 아닌 주인처럼 동그랗고 정갈한 느낌의 글씨였다.
‘미안해’
‘빨리 일어났으면 좋겠어’
‘재현아. 보고있는데도 보고싶다’
‘미안해 다신 안그럴게’
‘많이 좋아해 재현아’
생긴 건 의미 없는 낙서들 같았지만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많이 좋아해 재현아’. 그 글씨 한자 한자가 재현의 눈과 마음에 박혔다. 재현의 심장이 요동쳤다.
‘있잖아, 재현아. 무섭게 고요한 내 세상에서 너는 가장 큰 진동이자 파장이자 울림이야.’
재현이 눈을 감고 누워 노트를 그대로 얼굴에 덮어버렸다. 온 몸이 떨려왔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영훈에게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눈을 감고 노트까지 덮여 있는데도 재현의 눈 앞엔 영훈이 보였다. 너무나 보고 싶은 그 얼굴 하나가.
드디어 재현의 퇴원 날이었다. 돌아온 집 거실 시계가 어느 덧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의도적으로 영훈이 재현의 연락을 피하고 있어 재현은 선우의 번호를 알아내 연락을 했다. 늘 그렇듯 영훈은 복지관 수업이 끝나고 물고기 밥 주러 개천에 들렀다 해가 지면 들어온다고 했다. 해가 지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재현은 망설이지 않고 문밖을 나섰다. 뜀박질은 아니었지만 내딛는 발걸음이 제법 빨랐다.
열심히 걸어 온 재현에게 보답이라도 하듯 개천에 다다르자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보지 않으면 그리운 그 인영이 보였다. 제법 차가워진 바람이 시렵지도 않은지 널널한 셔츠 하나만 달랑 걸친 채 두 손으로 다리 난간을 잡고 선 영훈의 모습이 재현의 눈에 들어왔다. 너무나 보고 싶던 그 얼굴이 보이니 맥없이 온몸에 힘이 다 빠지는 기분이었다. 해가 질 무렵이라 노을 빛이 개울 가득 담겨 반짝반짝 흐르는 빛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 모든 빛이 영훈 에게 비춰 쏟아 졌다. 적어도 재현의 눈에는 그랬다. 돌이켜보면 늘 그랬던 것 같았다. 재현의 눈엔 세상 모든 빛이 영훈에게로 쏟아지는 것 같았다. 더 수척해진 얼굴과 마른 몸이 애처롭게 서있는 그 모습을 보자 재현은 당장이라도 달려가 온몸 가득 영훈을 안고 싶었지만 가슴이 벅차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무엇이 이렇게 차오르는 걸까.
“김영훈.”
돌아볼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불러보았다.
“김영훈!!”
내뱉으면 차오르던 게 뱉어져 나올 줄 알았지만 이젠 시큰하게 아려오기까지 했다. 재현은 찡해지는 코끝을 애써 다잡고 다리 난간으로 다가갔다. 주먹을 쥔 손으로 가볍게 난간을 노크하자 떨림을 느낀 영훈이 그제 서야 옆을 돌아보았다. 재현을 보고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키우던 영훈이 이내 물기가 가득한 눈빛을 띄운다. 그 눈이 개울보다 더 빛나고 있었다. 톡,톡, 계속해서 재현은 난간을 두들기며 한 걸음 한 걸음 영훈 에게 다가갔다. 다가갈수록 영훈의 손에 닿는 진동이 커져갔다. 둥둥 울리는 게 점점 더 커져 마음까지 울려 퍼졌다. 재현은 알까, 본인이 굳이 손을 쓰지 않아도 영훈을 충분히 두드릴 수 있다는 것을.
어느 새 가까이 다가온 재현이 영훈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까맣고 동그란 그 눈동자가 5년 전 처음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랑 하나도 변함이 없이 그대로였다. 변한 것이 있다면 이제 그 눈동자의 주인에게 어떻게 마음을 표현할지 알게 되었다는 것.
"나 이제 너 안 보내."
내가 무섭도록 고요한 너의 세상 속에 가장 큰 진동이자 파장이자 떨림이라고. 재현은 영훈에게 확실한 단 하나의 떨림이 되고 싶었다. 손을 들어 영훈의 어깨춤을 잡고는 그대로 입을 맞췄다. 서투르고 어설프기 짝이 없는 몸짓이었지만 진심을 가득 담은. 이 모든 게 영훈 에게 닿기를 재현은 바랐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이 순간에 재현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너의 떨림이라면 영훈아, 넌 정신없이 돌아가는 시끄러운 이 세상 속에 내 단 하나의 정적과 고요야.
재현의 바람대로였다. 지금 이 순간도 재현은 영훈을 닮은 이곳에서 영훈과 함께였다. 무엇보다 재현의 입술에 닿는 이 열감이 둘이 함께 임을 증명했다. 이 둘의 세상이 아니 둘만의 세상이 멈춘 듯이 고요해 진, 주고받는 떨림만이 가득한 그런 날이었다.